말씀묵상/욥기 묵상

21.10.15 "고통에 대한 위로는 법칙이 아니라 공감에 있다." (욥 8:1-7)

명슬리안 2021. 10. 15. 06:56
300x250

욥기 8장 1-7절

고통에 대한 위로는 법칙이 아니라 공감에 있다.


Pixabay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욥기 8장 1-7절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INTRO

우리가 느끼는 그리스도인의 온도는 어떠한가

옛날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면 붙는 수식어가 있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

 

그러나 현재는 어떠할까?

기대감이 별로 없게 된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욥의 모습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자녀에게 인과응보 교리 적용

악인들의 운명

욥을 위해 예비되어 있는 행복한 미래와 관계

 

욥의 친구도 고난이 형벌이라 말한다.

엘리바스는 욥이 본질적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여기지만 모든 인간은 불가피한 불완전함이 있기 대문에

일시적으로 벌을 받는다고 말한다.

 

발닷은 네가 만일 죄가 없고 정직한다면- 조건을 갖고 있다.

발닷은 비난의 어투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욥은 앞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당한 괴롭힘을 주신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발닷은 이것에 항의를 하는 것이다.

 

발닷의 시각은 우주적인 원칙은 응보에 있다고 생각한다.

 

발닷은 자녀들이 죽은 이유를 들면서

정말 욥이 결백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겠는가 의문을 던지고 있다.

 

욥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여 죽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욥은 자녀들을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속죄의 의미로 제사를 드렸다(욥 1:5).

 

여기서 다시 발랏에게 느껴지는 감정은

비인격적인 언어이다.

 

부모에게 자식의 죽음은 꺼내서는 안되는 말이다.

또한 자식에게도 부모의 죽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참담한 상황 가운데 있는 욥을

교리로서 누르고 있다.

 

욥을 움츠려들게 하고 있다.

 

하지만 발닷은 욥에게 희망의 말을 준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고.

지금 겪는 고난 뒤에 주실 축복을 이야기한다.

 

알고는 있으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희망 고문이 될 수 있다.

 

고통 당하는 사람은 지금 고통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언젠간 낫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말은

기한이 지나면 지날수록 독이 된다.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내용을 보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자신의 상황이 언제 끝날지

바라보고 희망을 갖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기한이 점점 다가올수록

희망에 찼지만 결국 자신이 정한 기한이 넘어가자

무너지고 말았다.

끝내 수명이 더 줄게 되었다.

 

고통 넘어의 축복이 아니라

지금 당장 힘을 얻을 일이 필요한 것이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삶으로

고등학교 시절에 교회에서 내가 맡고 있는 일이 힘들어

어머니께 토로한 적이 있다.

 

내가 고통받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었다.

어리숙한 내가 15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혼자

이끌어야 하는 상황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미숙함에 갈등이 생기고

나는 그것을 참아내는 게 힘들었다.

미움받는 게 힘들었다.

 

하루는 교회에서 돌아와 저녁 먹는 식탁에서

울며 이야기했다.

"나 너무 힘들어"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원했고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시려 했다.

그 마음은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은 내게 위로보다는 고통이었다.

 

"너는 이 작은 일로 넘어질 인물이 아니야

큰 인물이 될 사람이야"

 

나는 그 말이 "참아"라고 들리는 듯했다.

희망차고 힘이 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울다가 혼자 견뎠던 시간이 있었다.

 

지나고 보면 맞는 말이고 감사한 말이지만

당시에는 오히려 더 무거워지는 말이었다.

 

예수님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아픈 자들에게 어떻게 대하셨는지 말이다.

 

"낫고자 하느냐"

가장 그들이 원하는 것을 물으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가라"

가장 필요한 것을 치유하시고 해결하셨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해줄 말은

예수님처럼 가장 필요한 말을 공감하며 해줄 것이다.

교리가 아니라

치유의 말이다.

치유의 물음이다.

 

어렵겠지만 예수님 마음, 예수님 입술 갖도록

도움을 구하며 살아가는 오늘이 되어야겠다.

 

기도

예수님 마음, 예수님 입술, 고통받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때론 필요한 침묵을 하는 내가 되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강요가 아니라 공감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도록 인도하옵소서.

 

728x90
300x250
LIST

웹마서치00서-